생각의 기록

@ 청년의 삶, 20대의 삶

5월요일 2020. 11. 14. 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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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한 끼로 버텨요"…20대 청년들이 추락한다

도저히 빚 갚을 형편이 안 되다보니 법원에 구제를 신청해 그 책임으로 부터 일단 벗어나는 절차가 개인 회생입니다. 올해 모든 연령대의 개인 회생 신청이 줄어든 반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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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이런 기사를 접했다. 30대의 중반을 지나가는 코너에서 이런 기사를 보면 여전히 가슴이 아프고 걱정스럽다.

무척이나 고단했던 20대를 보낸 탓에 내 일은 아니지만 내 일처럼 느껴진다. 

사실 80년대생들도 청년실업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자라왔고 유년시절에 IMF를 직통으로 맞은 부모님 슬하에서 알게모르게 경제난이라는 것을 몸으로 느끼고 살아온 것이 사실이다.  추억 보정 효과를 배제하고서도 요즘 20대는 나의 20대보다 더 힘들다. 매년 역대급을 갱신한다고 본다. 

 

나도 하루에 한끼로 버티던 시절이 있었다. 

고등학교때까지야 급식이 나오고 왠만하면 집에서 식사를 해결하고 옷은 교복만 입고 다니다보니 집안 가세가 기울던 말던 사실 큰 차이는 없었다. 딱히 기울 가세도 없긴했다. 중산층 미만의 집안이였다고 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가주택도 없었고 끽해야 중고차 한대가 다였던 집안이였다. 

 

대학교 들어가서는 본능적으로 집안사정이 어려웠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고 대학등록금은 학자금 대출로 막고 그외 생활비는 주3일 편의점 알바를 학업과 병행하여 생존해냈다. 그때 당시 시급은 2900원. 3년정도 같은 알바를 했으니 연차를 인정해줘서 마지막으로 받은 시급은 3200원이였다. 월화수목금은 학교를 가 강의를 듣고, 금요일 수업 끝나고 바로 편의점으로 가 오후 알바를 12시까지 뛰었다. 

그리고 토요일은 다시 오전부터 오후까지, 일요일도 오전부터 오후까지 대략적으로 3일간 약 30시간정도 일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받은 돈은 40만원이 조금 안되었다. 물론 편의점 동료가 땜빵을 서달라하면 기쁘게 서주었다. 내 손에 뒤어지는 손이 3만원정도 늘어나는 것이 그때는 그렇게도 중차대한 일이였다. 

 

그래도 한 편의점에서 3년간 일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사장님 내외분이 굉장히 좋으신분이였고 배울점이 많았다. 그 꼼꼼한 발주(상품주문) 스킬과 매장을 깔끔하고 정갈하게 관리하는 능력, 우람한 덩치에서 나오는 온화한 미소와 몇 안되지만 편의점 알바들을 일사분란하게 관리하는 인력관리까지 사실 많이 배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에게 금전적인 소득 외 경험치 2배 보너스와 같은 캐쉬템같은 알바로 정의하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시간의 긴 근무임에도 불구하고 점심은 별도 제공이 되지 않았다. 가끔 사주시긴 했지만 정기적인 공짜 점심은 없었다. 

그래서 항상 먹었던 것이 당시 700원이였던 삼각김밥과 750원이였던 작은 신라면 컵라면이다. 아는분이야 알겠지만 따로 먹는게 아니다. 

삼각김밥 적당히 20초 정도 데우고 라면을 먼저 시식한 후에 남은 국물에 삼각김밥 투하. 

 

세상에 그런 꿀맛이 없었다. 사실 20대 초반에 부족한 점심이긴 했다. 하지만 한시간에 3000원 버는 주제에 점심값으로 2000원 이상 쓰는 것은 사치이자 불필요한 소비라는 것이 같은 편의점계 동료들의 중론이였다. 물론 가장 행복한 순간은 김밥류나 도시락류가 폐기가 날때 이다. 폐기를 꼼꼼하게 확인하는 이유는 오로지 폐기를 온전히 내것으로 만들기 위함이였다. 

 

폐기가 발견되면 꼭 끌어안고 편의점 안쪽 사무실로 들어가서 떨리는 손으로 바코드 기계를 잡아 폐기를 찍고 사장님께 말씀드리고 시식을 하거나 집으로 가져갔다. 유난히 삼각김밥 폐기가 많은 날에는 집에 들고가서 냉장고에 넣어두고 다음날 아침으로 먹기도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구질구질하기도 하다만 나의 20대를 그랬다. 구질구질했다. 직장의 허리로 편입되어가는 30대의 눈으로 봤을 떈 참 구질구질하기 그지 없다. 

 

내 주변에 나같은 친구 밖에 없어서 모두 편의점 알바를 그렇게 열심히 했다. 편의점 크루가 결성이 되어 같이 술도 한잔하고 같이 모여놀기도 했으니 편의점 아르바이트 게임같은거 같기도 하다. 그렇게 대학졸업과 함께 편의점 크루는 모두 은퇴를 하면서 구질구질했던 편의점 시대는 막을 내렸다. 

 

졸업 후 군입대를 앞두고는 편의점, 영어학원강사, 주류회사 영업보조 이 3개의 알바를 뛰었다.

희미한 기억 속에서 토일에는 편의점, 월수는 학원강사, 화목은 영업보조 알바를 했다. 딱 금요일 하루 쉬었다. 

그렇게 해서 번돈은 편의점에서 20만원, 학원강사에서 40만원, 영업보조에서 30만원 약 한달에 90만원정도 벌었다. 

이 가난한 대학생이 여자친구까지 있어서 저 돈을 저금을 안하고 몽땅 써버리긴 했다. 

 

당시에는 돈버는게 재미있었다. 지금 보면 구질구질하지만 학업은 거의 내던져두고 저렇게 알바만 죽어라했다. 

지치지도 않았다. 왜냐면 통장에 돈이 없고 몸이 편한거보다 통장에 돈있고 몸이 피곤한게 마음은 더 편하니까. 

 

아무리 힘들었다 힘들었다 하지만 나의 20대는 알바 자리가 넘쳐났다. 편의점, 피씨방, 영어학원, 영업보조, 술집, 식당 원한다면 알바자리를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알바를 하다가 잘려도 큰 걱정하지 않았다. 또 구하면 되니까.

 

내가 보는 요즘은 그게 아니다. 시급이 오른 것은 좋은 뉴스지만 여러가지 경제난이 겹쳐서 소비구조가 경직되어있어 

나 떄는 그 흔했던 알바자리조차 없다는 것은 절망적이다. 

나의 20대가 80cm짜리 허들을 넘는 달리기 였다면 지금의 20대는 3m가 넘는 벽을 넘어가야하는 절망적인 상황으로 내게 비쳐진다.

 

축복받은 세대라 할 순 없지만 허들이 조금 낮은 달리기를 한 세대로써 위로의 말 한마디 꺼내는 것 조차 조심스럽고 그 의도가 잘못 전달되진 않을까 염려스럽다. 

 

도움이 되고싶다. 청년과 장년 사이에 끼어있는 사람으로 사회에 만연한 부조리와 불평등에 머리가 지끈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