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기록

@ 헬조선을 관통하는 화살; 자살

5월요일 2015. 12. 26. 16:48

기사 원문 :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51218500057&rftime=20150630



지난 18일 한 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이내 이 소식은 뉴스가 되었고 커뮤니티에도 한시적으로 이슈로 떠돌았다. OECD 국가 중 지난 11년간 1위(2012년 기준 10만명 당 29.1명)를 굳건히 지켜오고있고 형제의 나라 터키(2.1명)와는 15배 정도 차이가 나고 2위인 헝가리(22명)를 다소 큰 차이로 따돌리고 있는 것은 물론, 전세계에서는 자살률 1위인 리투아니아(29.5명)에 아주 근소한 차이로 2위를 달리고있다. 

(https://data.oecd.org/healthstat/suicide-rates.htm)


 이러한 자살선진국로서의 한국 사회의 현실을 목도하게 된다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 자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는 문제인식하고 해결책을 내기는 커녕 “이번 크리스마스는 예년보다 따뜻할듯”과 같은 뉴스와 비슷한 기계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다시말해 ‘자살’이라는 비극적 현상이 명백하게도 일상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기사로 돌아가서 얘기해보자면, 일상의 일상으로 편입되어버린 ‘자살’이라는 현상이 이슈가 된 이유는 

이 학생의 사회적 신분과 더불어 그의 다잉메시지가 암시하는 바가 사회 전반을 관통하는 어떤 것이였기 때문이다.


 그의 신분은 한국 최고의 명문대 서울대의 학생이였고, 그의 다잉 메시지는 ‘수저론’을 겨냥했다. 

한국의 3대 병폐중 학연, 지연, 인맥의 한 축을 담당해온 것도 사실이나 광복이래로 대학은 신분을 뛰어넘을 가장 수월한 수단의 역할을 충실히 해왔다. 

이러한 맹목적인 학벌에 대한 집착은 몸은 자유민주주의 사회에, 정신은 봉건질서속에 둔 부조화에 신음하는 한국사회에서의 목숨을 건 서바이벌의 일부였다. 


 여전히 직업의 귀천을 사농공상으로 논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래도 돈많으면 장땡이라는 천민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에 흠뻑 젖어 헤어나오지 못하는 자들이

 여기저기 적체되어있다. 그런 의미에서 서울대는 이 모든 것을 한큐에 날려버릴 궁극의 승부수로 장구한 역사를 지니고있다. 비록 내가 물고 태어난 수저가 흙인지 

진흙인지 금방이라도 흘러 내릴듯한 수저일지라도 말이다. 

 

 그도 분명 대학 합격의 소식을 접하고 그 어떤 누구보다도 행복해 했을 것이다. 하지만 대학 4년 조차 지나지않은 짧은 기간에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하지만 그의 유서에는 곧 죽을 자의 절박함이라기보다는 사회에 대한 냉소와 함께 분노 그리고 고통이 흘러나온다. 


 배워온 것은 합리지만 사회는 가진 자와 먼저 나온자로 대변되는 힘의 논리에 굴복을 요구했고 그들에게 기생하기를 강요했으며, 이질감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더이상 살아갈 이유도 목적도 없다고 진술한다. 이 사회를 살아갈 용기 없었던 것이 아니라 사회의 불합리성에 자신을 섞고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남긴 심도높은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51,515,399 - 1 = 51,515398 라는 산수적 사고를 할지도 모른다. 

51,515,399은 2015년 11월 기준 남한의 인구다. 거기에서 한명이 빠진 것이라, 하루에도 수십 수백번씩 움직이는 인구변화의 일부 일 것이라 간과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이유는 유서의 첫 문장때문이다. 아니 유서의 제목이라 봐야 할 것이다. 


“이 유서를 퍼뜨려주세요”


 그는 자신을 이렇게까지 몰아넣은 사회에 분노하고 냉소를 보내며 ‘남는 자’가 아닌 ‘이미 간 자’가 될 문턱 앞에서 무엇이 아쉬워 유서를 퍼뜨리고자 했을까. 그가 살고자 했던 제대로된 삶과 합리적인 세상에 대한 갈망의 반증이 아니였을까. 


수저는 밥먹는 용도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물고 태어난 수저가 사람을 죽이기 시작했다. 




유서 전문


제 유서를퍼뜨려주세요.


명환이 형이 딱 이맘때에 떠난 것 같아서 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오늘이군요. 생명과학부 12 월 18 일엔 뭔가 있나 봅니다. 저도 형을 따라가려고요.

힘들고 부끄러운 20 년이었습니다. 저를 힘들게 만든 건 이 사회고, 저를 부끄럽게 만든 건 제 자신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괜찮습니다. 더 이상 힘들고 부끄러운 일은 없습니다. 지금은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입니다.

많은 이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은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죽으면 안 된다.” 엄마도 친구도 그러더군요. 하지만 이는 저더러 빨리 죽으라는 과격한 표현에 불과합니다. 저를 힘들게 만든 게 누구입니까. 이 사회, 그리고 이를 구성하는 ‘남은 사람들’입니다. 죽는 것조차 마음대로 못 하고, 나를 괴롭힌 그들을 위해서 죽지 못하다니요.

또 죽는다는 것이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만큼 비합리적인 일은 아닙니다. 이걸 주제로 쓴 글이 ‘글쓰기의 기초’ 수업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으니 제 `에 써도 괜찮은 내용일 겁니다. 제가 아는 경우에 대해서, 자살은 삶의 고통이 죽음의 고통보다 클 때 일어납니다. 다분히 경제적인 사고의 소산입니다.

말이야 이렇게 했지만, 그렇다고 저를 너무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으로 보지는 말아 주십시오. 20년이나 세상에 꺾이지 않고 살 수 있던 건 저와 제 주위 사람들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아직 날갯짓 한 번 못 한 제가 아까워 잠실대교에서 발걸음을 돌렸고, 제가 떠나면 가슴 아파 할 동생과 친구들을 위해 옥상에서 내려온 게 수 차례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 힘이 듭니다. 동시에 부끄럽기 까지 합니다. 제 자신과 세상에 대한 분노가 너무 큰 고통으로 다가옵니다. 이만 꺾일 때도 됐습니다.

무엇이 저를 이리 힘들게 했을까요

제가 일생동안 추구했던 가치는 합리입니다. 저는 합리를 논리 연산의 결과라 생각합니다. 어느 행위가 합리적이라 판단하는 것은 여러 논리에서 합리적이라고 규정하는 것에 부합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의 합리는 저의 합리와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그렇다고 그걸 비합리라고 재단할 수 있는가 하면 또 아닙니다. 그것들도 엄밀히 논리의 소산입니다. 먼저 태어난 자, 가진 자, 힘 있는 자의 논리에 굴복하는 것이 이 사회의 합리입니다. 제 개인적으론 비합리라 여길 수 있어도 사회에서는 그 비합리가 모범답안입니다.

저와는 너무도 다른 이 세상에서 버티고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돌이켜보면 좋은 기억이 없는 건 아닙니다. 가장 행복했던 기억을 꼽으라면 둘이 있습니다. 하나는 작년 가을에 무작정 여권 하나 들고 홀로 일본을 갔다 온 일이고, 다른 하나는 이번에 제주도에서 돌아온 다음 날의 일입니다. 즐거운 여행을 끝내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건 보통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그날 들은 수업은 너무나도 흥미로웠습니다. 먼저 생물학 시간에 인간과 미생물의 상호관계를 배우고 너무나 감명 받았습니다. 인간과 미생물은 정말 넓은 분야에 깊게 상호작용 하고 있었습니다. 연달아 있는 서양사 수업에서는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배웠습니다. 유물론적 사관에 익숙한 저에겐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수업을 마치고 8 동을 나오는 길에 든 생각이 잠자리까지 이어졌습니다. 베버는 『직업으로서의 학문』에서 학문을 하는 것은 정신적 귀족이 되는 것이라 표현했습니다. 그때만큼은 제가 그 정신적 귀족이 된 느낌이었습니다. 서로 수저 색깔을 논하는 이 세상에서 저는 독야청청 ‘금전두엽’을 가진 듯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금전두엽을 가지지도 못했으며, 생존을 결정하는 것은 전두엽 색깔이 아닌 수저 색깔이군요.

맛있는 걸 먹고 싶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목이 너무 말라 맥주를 찾았지만 필스너우르켈은 없고 기네스뿐이어서 관뒀습니다. 처갓집 양념치킨을 먹고 싶지만 먹으면 메탄올의 흡수 속도가 떨어질까 봐 먹지 못하겠네요.

혹시 제가 실패하더라도 저는 여러분을 볼 수 없을 겁니다. 눈을 잃게 되거든요. 오셔서 손이나 잡고 위로해 주십시오. 많이 힘들 겁니다.

제가 성공한다면 억지로라도 기뻐해 주세요. 저는 그토록 바라던 걸 이뤘고 고통에서 해방됐습니다. 그리고 오셔서 부조 좀 해 주세요. 사랑하는 우리 동생 **이가 닭다리 하나나 더 뜯을 수 있게 해 주세요.

마지막으론 감사를 전해야겠습니다. 우울증은 상담치료와 약물치료로 완화됩니다. 상담치료로썬 환자의 말을 잘 들어주고 공감해 주는 것도 있지만 ‘실질적’인 위로를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근거도 없는 ‘다 잘 될 거야’ 식의 위로는 오히려 독입니다. 여러분의 사랑하는 사람이 우울증으로 괴로워 할 때 저런 말은 절대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해 주세요.

실질적인 위안이 된 사람으로 둘이 기억나네요. 하나는 **누나입니다. “힘들 때 전화해, 우리 가까이 살잖아.” 이 한마디로 전 몇 개월을 버텼습니다. 전화를 한 적은 없지만, 전화를 할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것도 이렇게 멋진 사람이 날 위로해줄 수 있다는 것이 정말 힘이 됐습니다. 누나 정말 고마워. 미안해. 결국 전화를 하지 못했네...

다른 하나는 ***입니다. ***도 정말 좋은 사람입니다. 질문 하나 할 때도 매번 안부 물어봐 주고 이것저것 챙겨다 주고 고마웠습니다. 또 제가 약대 준비할 땐 교재도 빌려 주고 결과 발표 일시도 상기시켜주는 등 물심양면으로 도와줬습니다. 약대 붙으면 맛있는 스시를 사기로 했는데, 결국엔 사지 못하게 됐네요. 고맙고 미안해... 행복하게 지내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