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기록

@ 국회가, 대의민주주의가 흔들리는 이유(2010. 5월 작성)

5월요일 2014. 9. 3. 10:06

최근 선거철이 다가오면서 신문이나 방송을 포함한 대중매체와 사람들의 구설수에 이번 선거와 그 후보자들이 오르내리고있다. 그 시일이 가까워 질 수록 최근 일어난 이슈들에 대한 언급이 많아지고 천안함이슈가 가장 궁극적인 이슈가 될거라는 둥, 노풍이 불어 정권심판론에 무게를 실어 줄거라는둥 여러가지 말들이 나오고 있다. 그와 동시에 또 한편에서 거론되고 늘 문제시 되어왔던 이슈는 바로 50%를 맴도는 선거투표율이다. 반수가 겨우 되는 선거의 투표율에서 어떻게 그 대표자가 그 지역구민을 대표할 수 있는가 라는 대의 민주주의와 국회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 제기되고 있다. 


고대 아테네에서 태초의 민주주의가 잉태된 이래로 많은 변화를 걸쳐왔다. 전쟁, 독재, 평화를 거치면서 민주주의는 닳고 다시 부활하고를 반복해 지금 이 순간에 까지 이르렀다. 대의민주주의, 이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채택한 민주주의의 방식이다. 머릿수는 늘어났고 사회는 복잡해져 모든 사안과 문제에 모두가 모며 토론을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져 그중 대표를 뽑아 권리를 대신 행사하는 사람을 뽑아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간접민주주의 즉, 대의민주주의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대의라는 것은 대신 의중을 반영한다는 뜻으로 모두가 직접적으로 참여할수없기에 소수의 사람을 뽑아 그 사람들을 통해 민의를 적용해 민주주의를 실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다시말하면 이 글의 주제인 국회는 그러한 대표자들로 구성된 기구이며 그것은 기구이상의 대의민주주의의 중심에 서 있는 민주주의의 한 기둥의 의미를 갖는다. 앞서 말했듯이 한국에서의 국회의 위상은 지속적으로 날개없는 추락을 하고있으며, 우리사회에서 대의민주주의라는 말이 무색할만큼 우리의 투표율은 낮아 그로인해 대다수의 의견이 아닌 소수의 의견만을 반영하고 있다는 있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사회가 직면한 위기이며, 하루빨리 극복해야 할 문제이기에 그 원인과 방안을 서술하고자 한다. 


첫째로 가장 오래된 문제인 시간의 부족을 들 수 있다. 소위 말하는 한강의 기적이 일어나고 경제적 부흥을 일궈낸지 십여년만에 한국은 이례적으로 민주화마저 이뤄냈다. 1987년 군부정권이 물러나고 아래로부터의 민주화의 첫 걸음을 내딛은 한국은 지금 제 1공화국부터 현재 민주화 나이 20세 이다. 사람도 그러하듯이 유아일 때에는 울기도 많이 울고 사고도 많이 치고 다친다. 그러한 90년대를 지나고 한국의 민주화가 10세가 될 무렵 회초리의 무서움을 알게 된다. 90년 말 구제금융을 받게 되면서 나라 전체가 시끌시끌하게 됐다. 민주화라는 것이 조금씩 조금씩 물이 종이에 스며들듯이 되야 하는 것인데 그 구제금융으로 우리는 한번 경제적으로 상처를 받고 또 다시 가난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슴속에 간직하게 된다. 그렇다. 민주화의 가장 큰 적은 가난이다. 이전 군부정권에서도 그러했듯이, 가난. 그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민주화를 연기하고 경제개발을 외치는 토목세력에게 권력을 일임하며 권위적 민주주의를 용인했고 사람들 또한 먹고 살기위해 진정한 민주주의 정치와는 괴리된 삶을 살아왔아오고 있다.. 그런 가운데 국회 역시 민주주의 사회에서 '民'없이 권력에 의지하고 권력을 친구삼아 홀로 발전해왔다. 겉모습으로는 어디 하나 흠잡을 때 없이 발전한 국회지만 내면으로 알차게 발전해오지못하고 여전히 걸음마 수준의 정치를 보여주고 있다. 그렇게 권력은 국회와 국민들과 괴리되서 '그들만의 리그'를 해왔다. 비록 민주화 나이가 20세에 접어 들어 성숙해질 나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만, 앞서 말했듯이 중요한 소프트웨어-물론 하드웨어 역시 중요하지만-가 현재 우리가 가진 시스템을 전혀 활용을 못하고 오히려 악용의 소지만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아가 정글에 던져져서 홀로 20년을 그곳에서 살아남는것과 부모와 소통하며 사회화를 해가며 그에 걸맞는 발달과정을 밟아 20년을 사는 것과 그것은 뚜렷한 차이를 보일 것이다. '民'이라는 부모와 함께 하는 시간이 많이 갖지 못한 우리 국회는 그저 갓난아기에 불과하다. 말하고자 하는 '시간'의 의미는 바로 이것이다; 소통의 시간. 소통을 하면 할수록 국회는 성숙해질 것이고 그에 따라 민주주의는 발전할 것이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인터넷이 보급되고 전자민주주의가 대두되면서 정치 사회 경제부문에 많은 관심이 쏠리기 시작했다. 투표권을 행사하던 주연령층이던 사오십대를 넘어서 심지어 십대나 이십대들도 정치에 관심을 보이며 국민의 대표자들과 그 기관에 관심이 모이기 시작했다. 즉 국민과 어느정도 소통을 시작하기 시작한 시점을 2000년으로 잡고 시간을 잰다면 우리는 여전히 10살배기에 불과한-소통이 부족했던 만큼 더 미성숙할수도 있는- 민주주의사회에 살고 있다. 이 사회에겐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다. 10년이든 20년이든 국민들의 관심속에서 구르고 넘어지고 일어설 우리에겐 그럴 시간이 필요하다. '民'이 좀더 시간을 갖고 성숙해진다면 그동안 보인 국회와 권력의 행태에 쌓인 불신을 청산하고 앞서가는 국회를 건설할 수 있다고 본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 두번째 이유로 국회와 그 구성원에 대한 대한 국민의 무지와 무관심을 들 수 있다. 2000년에 들어서 많은 무관심들이 관심으로 변해왔지만 그 관심의 그 양보다 그 질에 있어서 여전히 부족한 면이 많이 드러난다. 예를 들어 관심은 있지만 정보를 선별하지 못해 사탕발림이나 유언비어에 넘어가 스스로의 판단을 포기하고 따라간다던가, 일종의 편견이나 닫혀있는 사고로 접근해 호의적이지 않은 쪽의 정보를 무차별적으로 무시하는 경우를 들 수 있겠다. 다시 말하면 정보를 최대한 객관적으로 바라볼 비판적 사고를 가지지 않았을 경우 그 관심은 오히려 걸림돌이 되기 일쑤다. 또 한가지 예를 들어 지역구 의원으로 A후보와 B후보가 경합을 벌이는데 어느 후보에게 표를 던질 것인가 라는 선택에 앞서 그 후보의 공약이나 약력, 혹은 성향 등을 먼저 고려해야하지만, 단지 학연, 지연 혹은 정당만을 보거나, 비현실적인 공약으로 인한 인기몰이 포퓰리즘에 휩쓸려 표를 주는 경우, 그러한 포퓰리즘에 잘못된 표를 던져 실망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정보에 문을 열어두지 않고 기존의 지식에 의존해 투표를 하는 경우등이 있을 수 있겟다. 조금만 정보를 찾아보고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면 선별해 낼 수 있는 정보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무시하면서 투표권을 제대로 행사할리가 만무하다. 예외적으로 후보가 맘에 들지 않아 정당의 성향을 기준으로 표를 던지는 경우도 있는데 과연 그 정당이 과거에 어떠한 역사가 있고 그들이 내세웠던 법안이나 공약들이 과연 내가 원하는 세상을 만드는 쪽을 위해 제시 되고 지켜졌는가 를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한다. 국회는 국민을 대표하는데 최대한 깨끗하고 거리낌없는 사람들의 집단이여야한다. 앞서 말했듯이 투표권에 대한 기능을 인지할 교육과 시간이 부족했던 만큼  여전히 민주주의에 대한 개념과 선거 그리고 투표권에 대한 제대로된 인지를 가지지 못한 사람들의 맹목적인 투표권행사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고있는지 알아채지 못하고 늘 현실정치에 대해 불만만 늘어놓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그들은 정치를 회의적인 시각으로 보고 참여가 아닌 방관으로 태도를 바꾸곤한다. 바로 이것이 포인트다, 이런 악순환이 반복 될수록 국회의 발전는 늦춰질수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국회의 부실로 이어지고 그 부실은 다시 국민들을 실망 시킬 것이고 국회와 의원들에 대한 나쁜 인식으로 자리 잡게 되고 또다시 투표율의 하락의 결과로 수렴하게 된다. 또한 그것은 국회를 계속 그들만의, 소수만을 대표하는 국회로 전락시키는 악순환이 반복될 수 밖에 없다. 또 하나의 무지로써 보여지는 것은 지역감정이다. 흔히 한국은 경상도와 전라도로 나눠진다. 경상도는 한나라방의 표밭, 전라도는 민주당의 표밭. 보통 이렇게 나눠지고 조롱이라도 하듯이 이런 애기도 나돈다 "OO도엔 OO당 종이(Paper)가 나와도 당선되겠다" 라고. 이젠 케케묵은 과거정권의 이념에 놀아나는 일은 없어야한다. 마치 몇백년동안 반목 해왔던 것처럼 OO도놈 OO도놈 이라며 서로 대립하는 모습이 한 나라의 선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면 그것은 선거가 아닌 지역대립에 불과하고 선서라는 권리행사라는 숭고한 의무를 더럽히는 꼴이다. 국회에 입성하는 대표자를 정하는 힘은 국민에게 주어진 가로 10cm, 세로 22.1cm 의 1.3cm 종이, 투표용지에서 나온다. 맹목적인 신뢰가 아닌 합리적인 정보에 기반한 신뢰를 통해 대표를 선출해야 한다.


셋째로, 미성숙한 선거과정을 거쳐 선출된 의원의 자질과 국회의 분위기이다. 흔히 국회의원은 일인권력기구라고 한다. 여당이냐 야당이냐 다선의원이냐 초선의원이냐에 따라 그 권력 또한 천차만별이겠지만, 하지만 궁극적으로 이 단어가 내포하는 의미는 그 어감만으로도 상당히 강력하다. 선거를 통해 민주주의의 대원칙인 다수의 원칙에 의해 선출된 한사람의 의원은 하나의 기관과 맞먹는 힘을 가진다는 것이다. 즉, 국민들로부터 다수의 지지를 얻어 올라간 자리이므로 민주주의에서 가장 큰 명분과 영향력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대중매체를 통해 국민들이 전달받는 모습은 그리 숭고한 대표자로서의 권력의 모습은 아니다. 민의를 수렴하고 국가대사를 이끌어나가야할 곳에서 그들은 욕짓거리를 하고, 단단한 것을 던지며, 공사판 못지 않는 모습들을 보여준다. 매체를 통해 그들의 모습을 접할 때마다 과연 저 장면이 한국이라는 세계경제의 한 축을 맡고 있는 국가의 국회인가, 일부 개도국들이 부러워하는 하나의 발전모델로써의 한 국가인가 라는 의구심이 들 정도이다. 그 의원들의 자질을 논하자. 그들은 말할필요도 없이 대한민국의 엘리트들이다. 보통 그들의 대부분은 한국 최고의 대학을 나왔고 최고의 교육을 받았으며 대한민국 어딜 가더라도 눌리지 않는 그들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 모습은 부끄럽고 안타깝게 느껴진다. 여기서 자질이라는 단어를 정의르 내릴 필요가 있다. 자질이란 비단 교육수준만을 일컫는것이 아니다. 청렴해야하는 도덕성, 각 지역의 대표이자 일꾼으로서의 성실성, 불의에 저항할 정의성, 자신의 이익보단 나라전체의 이익을 생각해야할 공익성등을 들 수가 있을 것이다. 전현직 의원들의 전직을 보았을 때 변호사의 비중이 굉장히 크고 그 외에도 고학력 위주로 구성 된 것을 보면 국회가 이따금씩 공사판의 분위기를 풍기는 이유는 선출된 의원들의 자질은 대체로 교육수준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가 있다. 최고의 대학을 나왔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국민을 대표하는 자로서의 의무감과 책임감이 기반되어야 한다. 물론 교육수준 또한 중요하다 어디서 법이나 정치에 그리고 국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덜컥 의원으로 추대할 순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의원에게 중요한 것은 그 일에 대한 거대한 책임감을 인지하는것과 그에 맞게 행동해 나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민주주의에서 국민을 무지하다고 여기는 것이 무지한 생각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최고의 대학을 나오고 교육을 받았다는 사실에 빠져 엘리트주의에 빠져 국민을 계몽의 대상 또는 무지한 대중으로 여기는 태도가 지속된다면 점점 민의와 동떨어진 국회만이 섬처럼 둥둥 떠다니며 여론을 수렴하고 더 나은 미래를 창출해가는 국회를 기대하고 힘들 것이다. 


우리국회가 겪고 있는 이 모든 문제의 핵심은 신뢰에 있다고 본다. 첫단추부터 잘못들어가 그 중간과정은 더 엉망이였고, 잠시 제자리를 찾아가나싶더니 결국 다시 제자리걸음을 걷고 있는 실정이다. 이 모든 것이 오랜시간 민주주의 국가가 된 후 조금씩 누적된 국회와 국민과의 불신의 문제라 볼 수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불신으로 가득차 있다. 생산자와 소비자, 정부와 국민, 선진국과 개도국. 모두 서로를 견제하고 계산하는데 너무 많은 자원과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다. 그 비효율성과 낭비를 꺠기 위한 궁극적인 해답은 신뢰를 쌓는데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 사회에서 가장 큰 버팀돌이 돼야 할 신뢰가 무너져 있다. 국회도 국민을 못믿고 국민도 국회를 역시 믿지 못한다. 서로에게 무지하다며 그나마 관심갖는 것은 선거철 그 한철이다. 이제 그 선거철조차도 관심을 접고 있다. 국회는 알아야한다. 국민이 배제된 국회는 그것이야말로 '식물국회'라는 것을. 국민 또한 알아야한다. 아무리 현실이 힘들어도 그 해답은 정치, 국회에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