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기록

@ 백야행, 하얀 밤을 걷는 사람들(feat. 사우디아라비아)

5월요일 2019. 6. 8. 01:35

 

저는 일본 소설을 꽤 좋아합니다. 텍스트의 이미지화가 수월하다고 해야할까요? 영미권이나 러시아쪽 소설은 아무리 읽어도 수사적 표현이나 배경같은 것들이 저에게는 와닿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일본은 언어적으로도 가깝고 지리적, 감성적인 부분도 상당히 밀접해서 그런지 문장 하나하나가 감성을 어우르는 경험을 왕왕 하게됩니다. 

 

일본 소설 중에 백야행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드라마로도 나와서 꽤 인기를 끌었습니다. 드라마를 보면서 으흐흑으으흐흐흐흑 흐느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특히 제가 좋아하는 일본 배우 야마다 타카유키가 나와서 저는 더 좋았습니다. 잘생겼어... 나중에 소재 떨어지면 이 배우에 대한 리뷰를 써보려고 합니다. 

일본 드라마 백야행(2006)

 

제 글은 항상 서론이 길어요. 글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가 있다고 합니다. 더 나이가 들면 얼마나 설명충이 될지 가늠이 안됩니다. 

위 소설과 드라마는 사랑이야기입니다. 서로 사랑하지만 같이 한낮을 같이 걸을 수 없는 슬픈 운명을 가진 연인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백야행'을 다른 의미로 해석하고자 제목으로 차용했습니다. 

지금부터 제가 풀어놓은 이야기는 제가 사우디아라비아에 있을 때 만났던 친구들의 이야기입니다. 

사우디에서 일하게 되면 업무적으로 부딪치는 사람들은 사우디 사람들이 아니고 제3국사람들입니다. 파키스탄, 시리아, 레바논, 이집트, 필리핀, 인도, 모로코, 예멘 등등 흔히 말하는 대표적인 인력 수출국들이거나 정치적 불안정으로 갈등 국면에 있는 국가들입니다. 

 

인력수출국가에서 온 사람들이야 나름대로야 사연이 있겠지만, 있을 법한 사연들입니다. 가족들이 부양해야 하거나, 본국 임금이 너무 적어서 왔다거나 그냥 생각 없이 온 사람들도 있죠. 혹은 이민 2세대 3세대들도 많습니다. 사우디가 석유로 부강해질 무렵, 사우디 국적을 남발하곤 했는데 그때 당시 아무 생각 없이 성지하나 믿고 오신 분들의 다음 세대들이죠. 

 

그 다음 세대들 중에서 본국이 불안정해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합니다. 

 

시리아 국적의 한 친구를 만났습니다. 20대 중반의 여자입니다. 

배경 설명을 조금 하자면, 사우디 정부는 사우디 내에서 거주하는 외국인들을 내쫓는 정책을 진행 중입니다. 강제 추방할 수 없으니 인두세를 어마어마하게 걷어버립니다. 본국이 불안정한 국적의 사람들은 갈 곳이 없기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로 세금을 내며 사는 수 밖에 없죠. 해외여행도 쉽지가 않습니다. 혹시나 재입국 시에 입국 거부를 당하게 되면 정말 국제 미아가 되어버리는거죠.

 

학교를 다닐 때 사우디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괴롭힘도 종종 당하곤 했습니다. 뒤에서 머리를 당기거나, 강의실에 들어갈 때 시리아년아 꺼져라! 라는 야유를 받기도 했죠. 시리아 사람들이 피부가 하얗고 미모가 뛰어난 탓도 있었겠지만 이유없는 제노포비아입니다. 사우디 사람들은 외국인이 들어와서 피해받는게 없습니다. 오히려 본인들은 놀고먹으면서 실제로는 외국사람들이 와서 이 나라를 굴리고 있는거나 다름이 없는 시스템이기 때문입니다. 이 친구에게는 사우디아라비아는 거대한 감옥입니다. 떠날 수도 없고 머무르고 싶지도 않은 땅입니다.

 

척박한 땅에서 꿈은 계속 키웠습니다. 만화도 좋아하고 그림 그리는 것도 좋아합니다. 디자인을 배워서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일하고싶다고 합니다. 언젠가 회사에 필요한 로고 가안을 받을 수 있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사실 그렇게 중요한 로고도 아니였지만 어린시절부터 제가 당연하게 여겼던 기회를 당연하게 박탈당했던 이 친구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랐습니다. 어찌나 정성들여 가안들을 보내주던지, 부탁한 제 자신이 민망하고 미안할 정도였습니다.

 

한번은 다른 친구들과 함께 집에 초대해서 같이 영화도 보고 저녁도 같이 했습니다. 사우디에서 살려면 홈엔터테인먼트는 필수입니다. 플레이스테이션, 닌텐도, 대형티비를 모두 갖추고 같이 비디오게임도하고 보드게임도 했습니다. 그렇게 재미있어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그렇게 속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술을 먹는 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칼칼한 목을 달래주는 콜라를 한잔하면서 이야기를 들어보면 기가 찹니다. 

여성으로서 외출은 쉽지 않고, 복장은 제한받고, 집에서 할 수 있는 몇 안되는 놀이는 넷플릭스와 유튜브가 거진 전부 다라고 합니다. 

 

시리아 내전이 발생하기 이전에는 시리아를 종종 방문했었다고 합니다. 시리아로 돌아가면 시리아사람들은 이 친구를 사우디년이라고 욕한다고 합니다. 사우디에선 시리아년이라고 욕을 듣죠. 이런 이야기를 천진난만하게 웃으면서 합니다. 저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지 몰랐습니다. 당사자는 웃고있는데 화를 낼 수도 없는거고 지나간 군대 시절 마냥 웃으며 넘길 수는 없는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사우디에 살고있지 않기 때문에 가끔 인스타그램이나 메신저를 통해 안부를 묻곤 합니다. 모든 것이 멈춰버린 나라에서 이 친구는 여전히 "그때 참 재미있었는데.."라며 같이 놀던 시간을 회상하는 메시지를 보내곤 합니다. 친구의 순수한 마음이 가슴 한켠에서 떠나질 않습니다. 다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조용히 응원하고 그 친구의 나라가 다시 잘 안정되길 바라는 거겠지요. 

 

이유없이 하얀 밤을 걷고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밤을 빼앗기고 끊임 없이 하얀 밤만을 걷는 이들이 있습니다. 

저에게는 당연했던 낮과 밤과 같은 소소한 일상의 행복, 다양한 기회와 만남, 즐거움들은 그들에게는 마블영화를 보고 난 이후에 영화관을 나서며 "재미있었다"라고 말하는 것 이상의 의미에 지나지 않습니다.

 

제가 가진 것에 대한 만족과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한 욕심 사이에서 방황할 때, 사우디에서 만났던 친구들과의 만남을 곱씹어보곤 합니다.